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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21 문화심리학의 눈으로 본 일본 <일본 열광>






출처:문화심리학의 눈으로 본 일본 <일본 열광>

일본 열광 (김정운 지음 / 프로네시스)

단숨에 읽었다. 재밌다. 웃긴 얘긴데, '독일 박사도 이렇게 재밌는 글을 쓸 수 있군' 하는 생각을 했다. 적게 읽은 사람이 갖는 얄팍한 편견이지만, '독일 박사'가 썼다 하면 '아 머리 아프겠군'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농담 한 토막 없을 것 같고. (대학때 생긴 트라우마겠지만.)

지은이는 김정운 교수. 몇 해전부터 여러 매체에 나와 "노는 만큼 성공한다"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는 등의 주장을 펼치던 분이다. 그땐 사실 시큰둥했다. '여가경영학'이란 게 참 그랬다. 뭐 저런 것도 팔아먹나. 노는 것도 배워서 노나 하는 생각에 궁시렁. 놀라고 하면 공부하고 싶어지는 학생처럼 투덜투덜.

근데 이 책을 보니 그게 아니다. '문화심리학'을 전공한 지은이가 말하는 문화란 '정서 공유의 리츄얼(정형화된 문화적 절차)'. 특히 놀이와 축제는 가장 대표적인 정서 공유의 방식이다. 그래서 놀지 못하면 삶이 궁핍해지고, 잘못 놀면 삶이 누추해진다. 어떻게 노는지 들여다보면 한 사회의 핵심을 읽을 수 있고, 어떻게 놀아야 할지를 고민하면 사는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여가경영학'의 영역도 비슷하겠지...하고 짐작.)

책은 특히 노는 문화를 중심으로, 일본의 구석구석을 관찰하며 일본 특유의 정서 공유 방식을 짚어낸다. '하얀 빤스'를 살짝 비추는데 집착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도덕적 마조히즘'을 읽고, 사무라이 추앙을 보며 절차적 권위주의가 낳는 절제의 일상화를, 음식 문화에선 결핍의 일상화를 엿본다. 도시락 문화를 통해서는 결핍을 달래는 배려의 문화를 짚어낸다. 그리고 일본 문화의 핵심 키워드를 배려, 결핍, 자학으로 정리한다.

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비고츠키의 문화심리학 이론의 개념들을 도구로 삼는데, '아. 개념이 있으면 관찰의 깊이가 이렇게 깊어지는 구나'하는 감탄을 자아내는 부분들이 있다. 또 라브호테루(러브호텔)부터 메이드 카페까지 모든 것을 몸소 체험하며 담아낸 생생함도 빛난다. (간혹 너무 솔직한 아저씨 때문에 곤혹스러웠지만.)

덧) 일본과 비교해 한국의 문화를 생각하다가, 사회가 빡빡한 거의 모든 원인이 분단에 있다는 생각에 닿았다.

밑줄)
* 내가 일본에서 느끼던 그 부담스러움의 정체는 바로 이 '도덕적 마조히즘'에 있었다. 이는 타인의 면전에서 자신을 끝없이 괴롭힘으로써 상대방의 자발적 죄책감을 유도하는 고도의 심리적 전략이 되기도 한다. (본문 34)

* 서구 문화에 대한 과도한 복종과 순종적 태도도 마찬가지다. 고이즈미 전 수상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엘비스 프레슬리의 생가를 방문해 엘비스의 춤을 흉내내며 몸을 흔들어댔다. 난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쪽팔림'에 정말 힘들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던, 같은 동양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아주 심각하게 손상을 입은 듯 하다. 그러나 정작 일본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이 '머리카락만 리처드 기어 닮은' 고이즈미 전 수상이 우리나라 대통령보다는 외교적으로 훨씬 현명했다는 것이 국제적인 평가다. 이렇게 해서라도 원하는 얻겠다는 것이 바로 이 일본식 도덕적 마조히즘의 핵심이다. (본문 36)

* 영화 <철도원>의 오토마쓰는 그저 오가는 기차를 맞이하며, 아주 단순한 신호만을 보내는 일도 평생을 보낸다. 그 일로 평생을 보낸 그를 위로하려 저승에서 죽은 딸이 돌아온다. 그리고 "무엇 하나 좋은 일 없었던 아버지"라며 엄마가 매일 입었던 빨간 조끼를 입고 찌개를 끓여준다. 밥상을 대하고 오토마쓰는 정말 오래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나는 행복한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한다.

우소! 거짓말이다. 어떻게 그런 삶이 행복한 삶이겠는가. 그러나 근대 일본 남자의 삶은 그래야 했다. 근대 일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동양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근대 기술을 빈틈을 메우는 삶을 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착한 아들들을 장인정신이란 이름으로 위로했다. 일본에는 이런 착한 아들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그 다음 세대인 '젖은 눈'의 일본 남자들은 이젠 '기계 빈틈 메우기'와 같은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한다. 그래서 그들은 위로가 되는 여인을 데리고 떠나는 것이다. 수많은 애니메이션에서 기차는 지친 삶에서 주인공을 건져주는 구원의 도구가 된다. 슬픈 한국 남자는 당구장으로 가고 슬픈 일본 남자는 기차를 탄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기차는 절대 이들을 구원해줄 수 없다. 신칸센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그 아버지의 긴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다. 그 기차는 모두 그 아버지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본문 190~195)

* 모두가 같은 방식의 삶을 사는 평등한 사회에 만족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감동이 있기는 어렵다. (본문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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